[MZ 톡톡] '원 히트 원더'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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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호 바운드포(Bound4) 대표
예술가는 인고의 시절을 인내한다. 작품이 돈으로 바뀐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세상을 향한 자신의 관점을 드러낸다.
인내의 결과가 세상의 인정을 받는 건 작가의 영역이 아니다. 전무후무한 걸출한 예술가도 생전에 외면받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동시대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차이가 크지 않은 작가는 운이 좋다. 타협과 자기모순 없이 자유롭게 자신을 드러내도 사랑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모든 창작자는 불안하다. ‘희망의 여백이 두렵다’는 박경리 작가 말마따나, 희망은 때로 사람을 타협과 기만에 빠뜨리며 자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성공 원인이 때로는 도태와 패착의 배경이 된다.
며칠 전 메타가 스마트 글라스 ‘오라이언(Orion)’을 공개했다. 안경으로 스마트폰과 동일한 기능을 구현할 수 있는 웨어러블 디바이스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는 오라이언을 스마트폰을 이을 ‘컴퓨팅 디바이스’로 소개했다. 메타버스에 집중하겠다며 사명을 페이스북에서 메타로 변경한 그다. 하지만 지속해서 투자한 증강, 가상현실 사업에서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메타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일이 늘었다. 저커버그는 소셜미디어를 이끈 원 히트 원더(한 곡의 큰 성공을 거둔 후 지속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아티스트)가 될까, 아니면 스티브 잡스 계보를 이을 아이콘이 될까.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작품이 안 팔릴 것이오. 그러니 그림으로 우리가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마시오.” 화백이 아내에게 건넨 말이다. 내외는 그림이 돈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매일 여덟 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작품이 처음 팔린 건 1975년 나이 ‘예순’ 무렵이었다. 화백은 이 시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팔린다는 생각에 구속되지 않음으로써 나는 하고 싶은 생각, 하고 싶은 일을 그만큼 한 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생각은 할 수 있었다.” 한국의 대표 추상화가 유영국 화백 얘기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세간에 위기감이 감돈다. 막연함 속 희망찬 이야기들이 어불성설로 들린다. 하지만 빛이 있는 삶은 생명을 잃지 않는다. <토지> 1부를 쓰던 3년을 회고하면서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 박경리 작가의 모습을 떠올린다. 무수한 감상에서 벗어나 실타래처럼 얽힌 과업을 하나둘 정리한다. 그리곤 유영국 화백의 말을 곱씹어본다. “바라볼 때마다 변하는 것이 산(山)이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것이다.”
인내의 결과가 세상의 인정을 받는 건 작가의 영역이 아니다. 전무후무한 걸출한 예술가도 생전에 외면받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동시대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차이가 크지 않은 작가는 운이 좋다. 타협과 자기모순 없이 자유롭게 자신을 드러내도 사랑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모든 창작자는 불안하다. ‘희망의 여백이 두렵다’는 박경리 작가 말마따나, 희망은 때로 사람을 타협과 기만에 빠뜨리며 자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성공 원인이 때로는 도태와 패착의 배경이 된다.
며칠 전 메타가 스마트 글라스 ‘오라이언(Orion)’을 공개했다. 안경으로 스마트폰과 동일한 기능을 구현할 수 있는 웨어러블 디바이스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는 오라이언을 스마트폰을 이을 ‘컴퓨팅 디바이스’로 소개했다. 메타버스에 집중하겠다며 사명을 페이스북에서 메타로 변경한 그다. 하지만 지속해서 투자한 증강, 가상현실 사업에서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메타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일이 늘었다. 저커버그는 소셜미디어를 이끈 원 히트 원더(한 곡의 큰 성공을 거둔 후 지속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아티스트)가 될까, 아니면 스티브 잡스 계보를 이을 아이콘이 될까.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작품이 안 팔릴 것이오. 그러니 그림으로 우리가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마시오.” 화백이 아내에게 건넨 말이다. 내외는 그림이 돈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매일 여덟 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작품이 처음 팔린 건 1975년 나이 ‘예순’ 무렵이었다. 화백은 이 시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팔린다는 생각에 구속되지 않음으로써 나는 하고 싶은 생각, 하고 싶은 일을 그만큼 한 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생각은 할 수 있었다.” 한국의 대표 추상화가 유영국 화백 얘기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세간에 위기감이 감돈다. 막연함 속 희망찬 이야기들이 어불성설로 들린다. 하지만 빛이 있는 삶은 생명을 잃지 않는다. <토지> 1부를 쓰던 3년을 회고하면서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 박경리 작가의 모습을 떠올린다. 무수한 감상에서 벗어나 실타래처럼 얽힌 과업을 하나둘 정리한다. 그리곤 유영국 화백의 말을 곱씹어본다. “바라볼 때마다 변하는 것이 산(山)이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