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안보 핵심 '공급망 안정'…다자주의 외교 중심에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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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일류 선진국으로 가자
제언 (3) 흔들리지 않는 공급망 강국
제언 (3) 흔들리지 않는 공급망 강국
탈냉전기 세계 경제의 키워드는 ‘밸류체인’(가치사슬)이었다. 연구개발(R&D)과 기획, 원자재 및 부품 조달, 제품 생산, 유통·판매 등 부가가치 창출의 전 단계를 각국 기업이 나눠 맡았다. 자유무역이 확대되고 정보기술(IT)이 발달하면서 세계 경제의 효율성은 극에 달했다.
이 같은 세계화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패권 경쟁을 거치며 밸류체인에서 ‘서플라이체인’(공급망)으로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지정학적 이유로 반도체나 핵심 광물을 안정적으로 조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다. 신뢰할 수 있는 국가끼리 글로벌 공급망을 빠르게 재편해 나가는 이유다.
대한민국은 글로벌 밸류체인의 최대 수혜국이었다. 자유무역 체제를 등에 업고 60년 만에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초고속 성장했다. 이제 초일류 선진국으로 한 번 더 도약해야 하는 시점에 커다란 도전에 직면했다. 어떤 지정학적 불확실성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 안보에 초점을 맞춘 정교하면서도 과감한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미국 유럽 일본 등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이 새롭게 구축하는 공급망 안에 확실히 자리매김해야 한다. 중국과의 공급망 협력도 그런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 국제사회에서는 한국 경제 성장의 토양이 된 ‘규칙 기반의 다자주의 국제 질서’를 수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글로벌 사우스 국가 등과 긴밀히 협력하며 공급망을 다변화·안정화할 수 있다.
과학기술 역량을 키우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초격차 기술을 보유하고 모두가 필요로 하는, 그러나 아무나 만들 수 없는 제품을 공급해야 공급망 내에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 기초과학의 저변을 넓히고, 실험적인 연구에 과감히 투자해 과학기술 강국으로 도약해야 하는 이유다.가치 외교가 공급망 강국 열쇠…국제질서 '새판 짜기' 주도하라
이마누엘 칸트가 ‘영구 평화론’을 발표한 것은 1795년이다. 모든 국가가 공화정을 채택하고 각 공화정으로 이뤄진 국제연맹이 국제법을 제정해 세계 시민들이 국제법의 보호 아래 안전하고 자유롭게 교류하면 국제사회에 항구적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이론이다. 국제정치학에서 자유주의 사상의 이론적 토대가 됐지만, 불완전하게나마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현실 세계에서 구현된 건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1990년대다. 냉전 종식 후 세계 패권을 거머쥔 미국이 전 세계 국가에 사실상 자유주의를 강요하면서다.
한국에는 천운이었다. 자유무역과 다자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 국제 질서는 냉전 시기 자유 진영에 소속돼 수출 주도형 경제 구조를 다져온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성장하는 천혜의 환경을 제공했다.
그런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30여 년 만에 끝나가고 있다. 미국 일극 체제에 균열이 생기면서다. 중국 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가 지역 패권을 노리고 저마다 현상 변경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는 미국은 자신들이 주창해 온 자유무역주의를 대놓고 부인한다. 자유무역 때문에 미국 내 제조업이 쇠퇴하고 공급망이 불안해졌으며 빈부 격차가 확대됐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지정학적 대변혁의 시기다.
한국은 선진국 문턱에서 갈림길에 섰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 질서 안에서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됐지만, 대변혁기에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응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꿔가야 한다. 필요하면 스스로 국제 질서의 새판 짜기를 시도하는 지혜와 용기도 갖춰야 한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공급망을 구축하고 초일류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뒤 자유주의 시스템의 혜택을 받아 급성장한 중국은 “옛 중화(中華)의 영광을 되찾겠다”며 약육강식의 현실주의 노선으로 급전환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을 외치며 대만을 위협하고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한다. 서태평양에서는 미·중 간 군사적 긴장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유라시아 패권국을 꿈꾸는 러시아가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도 미국 일극 체제의 균열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영토가 아니라 국제 질서에 관한 것이며, 러시아의 목표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공언했다. 우크라이나전 전황은 대만해협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권위주의 국가의 현상 변경 시도에 얼마나 강경하게 대응하는지 중국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패권주의자들이 떠드는 ‘규칙에 기초한 세계 질서’를 저지하고 파탄시키기 위한 정의의 조치”라고 규정하고 “세계 다극화를 실현하는 것이 정의의 위업”이라고 주장했다. 김씨 일가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지역 패권국 중심의 다극 체제가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미국이 과거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수호자로 온전히 되돌아갈 것이란 기대는 접어야 한다. 대선 이후 미국의 고립주의 속도가 더 빨라진다면 중국과 러시아가 꿈꾸는 다극 체제로의 전환 속도도 빨라질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시나리오다.
공급망 재편에서도 한국은 미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일극 체제에 균열이 가고 있지만 미국은 앞으로도 수십 년간 세계 초강대국 지위를 유지할 게 확실하다. 미국이 신뢰할 수 있는 나라를 중심으로 구축 중인 글로벌 공급망에서 제외되는 것은 한국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다. 특히 미국 등 서방 세계와 인공지능(AI), 양자, 우주, 반도체 등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 협력하는 것은 선진국을 넘어 초일류 선진국으로 가는 필요조건이다.
미국과의 신뢰 관계는 역설적으로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레버리지가 될 것이다. 한국을 신뢰하는 미국은 첨단 기술이 이전되지 않는 한 한국이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 경제 교류를 이어가는 일을 용인할 것이고, 미국의 전방위 견제를 받는 중국에는 서방 세계 일원인 한국과의 상호 투자 및 교역이 절실하다. 중국과 러시아도 한국에 한·미 동맹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다면 중·러는 한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고 할 것이다.
다자주의 기반의 가치 외교는 한국이 변화하는 국제 질서 속에 중재자 역할을 하는 동시에 공급망을 다변화·안정화하는 자산이 될 것이다. 미·중 패권 전쟁과 4차 산업혁명으로 몸값이 높아진 글로벌 사우스와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인도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핵심 광물 보유, 새 제조기지로서 매력,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지정학적 차별성으로 자유주의와 권위주의 두 진영에서 구애를 받고 있다.
이들 국가는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지만 다자주의를 중시하는 한국에는 예외 없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난 한국의 노하우와 기술을 전수받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6월 서울에서 열린 한·아프리카 정상회의에는 아프리카 55개국 중 48개국 정상이 참여했다. 같은 달 윤석열 대통령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줄어든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국빈 방문해 ‘핵심 광물 동맹’을 맺고 돌아왔다. 한국은 이렇게 전 세계에 걸쳐 촘촘한 공급망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지정학적 대변혁기, 생존과 번영을 위한 외교 전략에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전제 조건이 있다. 외교를 정쟁에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948년 미국 야당이던 공화당의 아서 반덴버그 상원 외교위원장은 민주당 소속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외교 문제에서 초당적 협력을 하기로 약속하며 “정치는 국경선에서 멈춰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렇게 채택된 ‘반덴버그 결의’가 아니었다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마셜플랜은 탄생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 명언을 잊는다면 역사에 죄를 지은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 현실주의 (Realism)
국제 사회를 국가들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는 무정부 상태의 냉혹한 정글로 보는 국제정치학 이론이자 관점이다. 국가는 자국의 이해득실에 따라 행동한다고 본다. “미국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직 국익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대표적 현실주의 정치인이다.
■ 자유주의 (Liberalism)
국가 간 관계를 ‘제로섬 대립’으로 보는 현실주의와 달리 국가 간 협력으로 평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자유무역과 민주주의의 확산이 국가 간 상호 의존성을 높여 전쟁을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유엔 같은 국제기구가 비폭력적 방식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 다자주의 (Multilateralism)
동등한 주권을 갖춘 국가들이 규범에 기반해 협력하는 국제 질서다. 인권 존중, 법에 의한 지배 등 국제 규범을 중시하며 강대국의 일방주의적 패권을 배격한다. 다자주의 국제 질서에서는 한국 같은 중견국(미들파워)이 중재자로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유창재 정치부장/송형석 테크&사이언스부장
이 같은 세계화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패권 경쟁을 거치며 밸류체인에서 ‘서플라이체인’(공급망)으로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지정학적 이유로 반도체나 핵심 광물을 안정적으로 조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다. 신뢰할 수 있는 국가끼리 글로벌 공급망을 빠르게 재편해 나가는 이유다.
대한민국은 글로벌 밸류체인의 최대 수혜국이었다. 자유무역 체제를 등에 업고 60년 만에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초고속 성장했다. 이제 초일류 선진국으로 한 번 더 도약해야 하는 시점에 커다란 도전에 직면했다. 어떤 지정학적 불확실성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 안보에 초점을 맞춘 정교하면서도 과감한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미국 유럽 일본 등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이 새롭게 구축하는 공급망 안에 확실히 자리매김해야 한다. 중국과의 공급망 협력도 그런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 국제사회에서는 한국 경제 성장의 토양이 된 ‘규칙 기반의 다자주의 국제 질서’를 수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글로벌 사우스 국가 등과 긴밀히 협력하며 공급망을 다변화·안정화할 수 있다.
과학기술 역량을 키우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초격차 기술을 보유하고 모두가 필요로 하는, 그러나 아무나 만들 수 없는 제품을 공급해야 공급망 내에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 기초과학의 저변을 넓히고, 실험적인 연구에 과감히 투자해 과학기술 강국으로 도약해야 하는 이유다.
가치 외교가 공급망 강국 열쇠…국제질서 '새판 짜기' 주도하라
글로벌 지정학 대변혁기…구애받는 '글로벌 사우스'
이마누엘 칸트가 ‘영구 평화론’을 발표한 것은 1795년이다. 모든 국가가 공화정을 채택하고 각 공화정으로 이뤄진 국제연맹이 국제법을 제정해 세계 시민들이 국제법의 보호 아래 안전하고 자유롭게 교류하면 국제사회에 항구적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이론이다. 국제정치학에서 자유주의 사상의 이론적 토대가 됐지만, 불완전하게나마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현실 세계에서 구현된 건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1990년대다. 냉전 종식 후 세계 패권을 거머쥔 미국이 전 세계 국가에 사실상 자유주의를 강요하면서다.한국에는 천운이었다. 자유무역과 다자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 국제 질서는 냉전 시기 자유 진영에 소속돼 수출 주도형 경제 구조를 다져온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성장하는 천혜의 환경을 제공했다.
그런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30여 년 만에 끝나가고 있다. 미국 일극 체제에 균열이 생기면서다. 중국 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가 지역 패권을 노리고 저마다 현상 변경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는 미국은 자신들이 주창해 온 자유무역주의를 대놓고 부인한다. 자유무역 때문에 미국 내 제조업이 쇠퇴하고 공급망이 불안해졌으며 빈부 격차가 확대됐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지정학적 대변혁의 시기다.
한국은 선진국 문턱에서 갈림길에 섰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 질서 안에서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됐지만, 대변혁기에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응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꿔가야 한다. 필요하면 스스로 국제 질서의 새판 짜기를 시도하는 지혜와 용기도 갖춰야 한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공급망을 구축하고 초일류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역사의 종언은 오지 않았다
1992년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에서 자유주의 체제의 최종 승리를 선언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약 20년 후인 2011년 언론 기고에서 “현재 미국의 민주주의로는 중국을 가르칠 수 없다”고 썼다. 자유주의를 대체할 정치 체제는 없다는 믿음은 그대로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한 것이다. 미국 일극 체제 아래 숨죽이던 중국이 도광양회를 폐기하고 굴기를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뒤 자유주의 시스템의 혜택을 받아 급성장한 중국은 “옛 중화(中華)의 영광을 되찾겠다”며 약육강식의 현실주의 노선으로 급전환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을 외치며 대만을 위협하고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한다. 서태평양에서는 미·중 간 군사적 긴장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유라시아 패권국을 꿈꾸는 러시아가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도 미국 일극 체제의 균열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영토가 아니라 국제 질서에 관한 것이며, 러시아의 목표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공언했다. 우크라이나전 전황은 대만해협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권위주의 국가의 현상 변경 시도에 얼마나 강경하게 대응하는지 중국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패권주의자들이 떠드는 ‘규칙에 기초한 세계 질서’를 저지하고 파탄시키기 위한 정의의 조치”라고 규정하고 “세계 다극화를 실현하는 것이 정의의 위업”이라고 주장했다. 김씨 일가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지역 패권국 중심의 다극 체제가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미국이 과거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수호자로 온전히 되돌아갈 것이란 기대는 접어야 한다. 대선 이후 미국의 고립주의 속도가 더 빨라진다면 중국과 러시아가 꿈꾸는 다극 체제로의 전환 속도도 빨라질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시나리오다.
생존을 위한 한국의 선택
한국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미·중 경쟁이 격화하고 북·중·러가 연대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을 위한 전략적 모호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북핵이라는 실존적 위협은 한국의 선택지를 더욱 좁힌다. 굳건한 한·미 동맹과 한·미·일 안보 협력은 번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선택이다.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 등 일본 수준의 잠재적 핵역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신뢰는 필수적이다.공급망 재편에서도 한국은 미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일극 체제에 균열이 가고 있지만 미국은 앞으로도 수십 년간 세계 초강대국 지위를 유지할 게 확실하다. 미국이 신뢰할 수 있는 나라를 중심으로 구축 중인 글로벌 공급망에서 제외되는 것은 한국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다. 특히 미국 등 서방 세계와 인공지능(AI), 양자, 우주, 반도체 등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 협력하는 것은 선진국을 넘어 초일류 선진국으로 가는 필요조건이다.
미국과의 신뢰 관계는 역설적으로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레버리지가 될 것이다. 한국을 신뢰하는 미국은 첨단 기술이 이전되지 않는 한 한국이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 경제 교류를 이어가는 일을 용인할 것이고, 미국의 전방위 견제를 받는 중국에는 서방 세계 일원인 한국과의 상호 투자 및 교역이 절실하다. 중국과 러시아도 한국에 한·미 동맹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다면 중·러는 한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고 할 것이다.
글로벌 사우스와 협력해 공급망 다변화
물론 미국에 순응하는 소극적 외교 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선진국이 된 한국을 향한 국제사회의 기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세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를 외교 전략으로 채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보호무역으로 방향을 잡은 역사의 물줄기를 자유무역으로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한국은 ‘규칙 기반 국제 질서’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모든 나라의 동등한 주권을 존중하는 다자주의가 계속 꽃피울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다할 책임과 필요가 있다.다자주의 기반의 가치 외교는 한국이 변화하는 국제 질서 속에 중재자 역할을 하는 동시에 공급망을 다변화·안정화하는 자산이 될 것이다. 미·중 패권 전쟁과 4차 산업혁명으로 몸값이 높아진 글로벌 사우스와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인도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핵심 광물 보유, 새 제조기지로서 매력,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지정학적 차별성으로 자유주의와 권위주의 두 진영에서 구애를 받고 있다.
이들 국가는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지만 다자주의를 중시하는 한국에는 예외 없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난 한국의 노하우와 기술을 전수받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6월 서울에서 열린 한·아프리카 정상회의에는 아프리카 55개국 중 48개국 정상이 참여했다. 같은 달 윤석열 대통령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줄어든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국빈 방문해 ‘핵심 광물 동맹’을 맺고 돌아왔다. 한국은 이렇게 전 세계에 걸쳐 촘촘한 공급망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정치는 국경선에서 멈춰야”
국제 질서의 판을 바꿀 새로운 컨센서스를 제시하는 적극적 외교 전략도 요구된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2007년 주창한 인도·태평양 전략이 좋은 벤치마킹 대상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나온 아베의 인·태 전략은 미국뿐 아니라 자유주의 진영의 대(對)아시아 전략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윤석열 정부가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신재생에너지만 강조하는 RE100을 대신해 원전을 포함하는 무탄소에너지(CFE) 이니셔티브를 내놔 국제 사회의 지지를 끌어낸 것은 한국 외교의 좋은 성공 사례다.지정학적 대변혁기, 생존과 번영을 위한 외교 전략에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전제 조건이 있다. 외교를 정쟁에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948년 미국 야당이던 공화당의 아서 반덴버그 상원 외교위원장은 민주당 소속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외교 문제에서 초당적 협력을 하기로 약속하며 “정치는 국경선에서 멈춰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렇게 채택된 ‘반덴버그 결의’가 아니었다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마셜플랜은 탄생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 명언을 잊는다면 역사에 죄를 지은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 현실주의 (Realism)
국제 사회를 국가들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는 무정부 상태의 냉혹한 정글로 보는 국제정치학 이론이자 관점이다. 국가는 자국의 이해득실에 따라 행동한다고 본다. “미국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직 국익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대표적 현실주의 정치인이다.
■ 자유주의 (Liberalism)
국가 간 관계를 ‘제로섬 대립’으로 보는 현실주의와 달리 국가 간 협력으로 평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자유무역과 민주주의의 확산이 국가 간 상호 의존성을 높여 전쟁을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유엔 같은 국제기구가 비폭력적 방식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 다자주의 (Multilateralism)
동등한 주권을 갖춘 국가들이 규범에 기반해 협력하는 국제 질서다. 인권 존중, 법에 의한 지배 등 국제 규범을 중시하며 강대국의 일방주의적 패권을 배격한다. 다자주의 국제 질서에서는 한국 같은 중견국(미들파워)이 중재자로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유창재 정치부장/송형석 테크&사이언스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