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무버' 최종병기는 과학기술…'K맨해튼 프로젝트' 닻 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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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일류 선진국으로 가자
기초과학·원천기술 최고의 국가
국가·기업 쌍끌이 R&D, 산업화 첨병
박정희 대통령 기술진흥 5개년 계획
사비 투입해 1966년 KIST 설립
1980년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주말마다 日기술자 초빙해 직원 교육
네이처 "韓은 연구 가성비 낮은 나라"
논문·특허 숫자 없으면 연구비 삭감
협업·소통 등 '이종교배'는 꿈도 못꿔
성과 조급증 버리고 실패 용인해 줘야
우주·양자기술 혁신적 도전 줄이어
기초과학·원천기술 최고의 국가
국가·기업 쌍끌이 R&D, 산업화 첨병
박정희 대통령 기술진흥 5개년 계획
사비 투입해 1966년 KIST 설립
1980년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주말마다 日기술자 초빙해 직원 교육
네이처 "韓은 연구 가성비 낮은 나라"
논문·특허 숫자 없으면 연구비 삭감
협업·소통 등 '이종교배'는 꿈도 못꿔
성과 조급증 버리고 실패 용인해 줘야
우주·양자기술 혁신적 도전 줄이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시절 한국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나는 굶어도 자식들은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열이 빠른 인적자원 축적으로 이어졌고, 그 덕에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게 오바마 연설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의 발언은 미국 교육 시스템을 질타하기 위한 것이었고, 과장과 오해도 섞여 있다. 하지만 한국의 고도성장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키워드 중 하나가 교육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교육열을 발휘하는 주체를 국가와 기업으로 바꾸면 연구개발(R&D)이라는 대한민국의 성장 키워드가 나온다. R&D는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연구하는 활동이다. 오랜 기간 끈기 있게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는 점, 투입한 자본 중 얼마를 어느 시점에 회수할지 예상하기 힘들다는 점 등에서 교육과 일맥상통한다.
한국에서 미래를 위한 기술 투자는 신념의 영역이다. 산업 기반이 없던 나라가 조선과 자동차, 반도체 등 주요 산업에서 세계를 주름잡는 것이 부단한 R&D 덕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주요 기업에도 기술 확보를 위해 고군분투한 일화들이 전설처럼 내려온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그룹 부회장으로 일하던 1980년대, 주말마다 몰래 일본 기술자들을 초빙해 직원 교육을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은 변변한 공장 하나 찾기 어렵던 1960년대부터 R&D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시작은 1962년부터 정부가 추진한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이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밑거름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해에 동일한 격(格)의 국가 단위 프로젝트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과학기술연구소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등장한 것은 4년 후인 1966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KIST 설립에 사비를 투입했고, 설립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당시 정부가 R&D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970년대 들어선 여러 정부출연연구기관과 대덕연구단지가 등장하며 본격적인 국가 R&D 시대가 열렸다.
국가가 끌고 기업이 미는 한국 특유의 R&D 시스템은 산업화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정부가 주도해 개발한 기술이 산업 곳곳에 스며들었다. 1996년 상용화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통신망은 대표적인 민관 협력 R&D 프로젝트 성공 사례로 꼽힌다. 퀄컴이 개발만 해놓고 있던 기술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SK텔레콤이 한국에 맞게 변형했고, 삼성전자 LG전자 등 단말기 제조사들도 힘을 합해 ‘세계 최초 상용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주요 산업에서 한국은 추격자의 위치에 있지 않다. 세계 1~2위를 다투거나 적어도 선두 그룹에 포진해 있다. 더 이상 벤치마킹할 만한 모범답안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면 ‘세상에 없는 것’을 개발해야 하지만 기대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는 모양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 화이자와 모더나를 비롯한 글로벌 빅파마는 기존 백신·치료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메신저리보핵산(mRNA) 제품을 발 빠르게 개발해 시장을 놀라게 했다. 한국 제약사들도 코로나19 백신·치료제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기초과학과 원천기술 부족이 한국 기업의 발목을 잡았다.
‘패스트팔로어’가 아니라 ‘퍼스트무버’들의 경쟁에선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이 중요하다. 원재료가 풍부하게 갖춰져야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올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은 크레파스에 비유할 수 있다. 크레파스는 많을수록 좋다. 12색 크레파스로도 그림은 그릴 수 있지만 64색·128색 크레파스를 쓸 때만큼 풍부한 색감과 표현을 기대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은 축적하는 데 꾸준한 투자와 긴 시간이 필요하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만 25명을 배출한 일본에선 첫 수상자가 1949년 나왔다. 일본이 공업대국 반열에 오른 지 거의 반세기 만이다. 1922년 세계 최초로 항공모함을 개발했을 만큼 기술력이 뛰어난 일본이지만 노벨 과학상을 받기까지 수십 년이 더 필요했다.
일본이 기초과학의 저변을 넓히는 데 100년이 걸렸다는 분석도 있다. 일본인 노벨 과학상 수상자 25명 중 2000년 이전 수상자는 6명에 불과해서다.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을 초일류 선진국의 마지막 퍼즐로 보는 것은 그만큼 허들이 높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면 수십 년에 걸친 지식 축적 과정이 필수다.
냉정하게 보면 한국의 크레파스는 아직 12색 수준이다. 돈이 되는 산업 기술에 R&D 역량을 집중하다 보니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에 신경을 쓰기 힘들었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여전히 한 명도 없고 일본이 소재, 부품, 장비의 수출을 막으면 산업계 전체에 비상이 걸린다.
이미 퍼스트무버 대열에 선 한국엔 다른 지름길이 없다. 기존 선진국,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려면 기초과학과 원천기술 수준 제고가 필수다. 이 싸움은 수십 년이 걸리는 마라톤이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R&D 예산 확대는 기본이다. 20~30년 걸리는 장기 연구에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하고, 연구자 처우도 끌어올려야 한다. 성과 조급증은 한편에 접어둬야 한다. 실패를 용인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성공 확률이 1~2%에 불과한 프로젝트에 과감히 도전할 수 있다. 미래 먹거리인 우주와 양자, 핵융합 발전 등의 분야에선 더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대다수 국내 연구자는 계량적 결과물에 집중한다. 이들에겐 논문을 몇 개 썼는지, 특허가 몇 개 나왔는지가 중요하다. 수치로 드러나는 결과물이 없으면 예산이 줄거나 프로젝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구자들은 소심해질 수밖에 없다. 실패 확률이 작은 논문을 위한 논문 연구가 대세가 되고, 혁신적인 도전은 뒷순위로 밀려난다.
여기에 사일로 현상이 더해진다. 사일로는 곡식을 저장하는 굴뚝 모양 창고에서 유래한 말이다. 조직의 편의와 이기주의 때문에 협업이 사라지면서 생산성이 뚝 떨어지는 현상을 뜻한다. 국내 과학기술계의 사일로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기업은 당장 가져다 쓸 만한 게 없다며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나 대학과 교류하지 않는다. 연구기관끼리도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불통은 비효율로 이어진다. 비슷한 연구가 곳곳에서 중복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전공이 다른 연구자들이 협업하는 ‘이종교배 연구’는 꿈도 꾸기 힘들다.
혁신 없는 사일로에 갇힌 과학기술계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소속 조직과 관계없이 다수 연구자가 모여 뚜렷한 목표에 집중하는 초거대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2차 세계대전 때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해 꾸려진 ‘맨해튼 프로젝트’가 좋은 롤모델이다. 이 계획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가 참여한 국제 프로젝트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요한 폰 노이만,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등의 천재 물리학자들을 필두로 전공이 제각각인 전문가 12만 명이 참여했다.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밝힌 게놈 프로젝트, 2025년에 달에 다시 유인 우주선을 보내는 아르테미스 프로젝트 등도 성공적으로 수행된 초거대 프로젝트다.
한국 R&D의 새로운 슬로건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글로벌 실험실’이어야 한다. 한국판 맨해튼 프로젝트가 곳곳에서 닻을 올리고 국내외 연구자들이 머리를 맞대는 과정에서 한국의 R&D 역량은 한층 더 고도화할 것이다.
송형석 테크&사이언스부장
교육열을 발휘하는 주체를 국가와 기업으로 바꾸면 연구개발(R&D)이라는 대한민국의 성장 키워드가 나온다. R&D는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연구하는 활동이다. 오랜 기간 끈기 있게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는 점, 투입한 자본 중 얼마를 어느 시점에 회수할지 예상하기 힘들다는 점 등에서 교육과 일맥상통한다.
GDP 5% R&D에 쏟는 대한민국
한국은 정부, 기업 할 것 없이 R&D에 진심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비율은 5.2%(2022년 기준)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다. 이 비율이 3%대에 머물러 있는 미국, 일본을 훌쩍 넘어선다. R&D에 쏟아붓는 절대 금액도 120조원대로 세계 6위를 달리고 있다. 순수 정부 예산만 가려내도 연간 30조원의 덩치를 자랑한다. 한국의 정부 R&D 예산은 2000년부터 2021년까지 640% 증가했다.한국에서 미래를 위한 기술 투자는 신념의 영역이다. 산업 기반이 없던 나라가 조선과 자동차, 반도체 등 주요 산업에서 세계를 주름잡는 것이 부단한 R&D 덕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주요 기업에도 기술 확보를 위해 고군분투한 일화들이 전설처럼 내려온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그룹 부회장으로 일하던 1980년대, 주말마다 몰래 일본 기술자들을 초빙해 직원 교육을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은 변변한 공장 하나 찾기 어렵던 1960년대부터 R&D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시작은 1962년부터 정부가 추진한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이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밑거름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해에 동일한 격(格)의 국가 단위 프로젝트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과학기술연구소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등장한 것은 4년 후인 1966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KIST 설립에 사비를 투입했고, 설립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당시 정부가 R&D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970년대 들어선 여러 정부출연연구기관과 대덕연구단지가 등장하며 본격적인 국가 R&D 시대가 열렸다.
국가가 끌고 기업이 미는 한국 특유의 R&D 시스템은 산업화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정부가 주도해 개발한 기술이 산업 곳곳에 스며들었다. 1996년 상용화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통신망은 대표적인 민관 협력 R&D 프로젝트 성공 사례로 꼽힌다. 퀄컴이 개발만 해놓고 있던 기술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SK텔레콤이 한국에 맞게 변형했고, 삼성전자 LG전자 등 단말기 제조사들도 힘을 합해 ‘세계 최초 상용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퍼스트무버’ 시대의 그림자
10여 년 전까지 한국 R&D의 핵심은 ‘선진국 추격’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제품이나 기술을 최단기간에 최소 비용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정부와 기업 R&D의 공통된 목표였다. 성과도 상당했다. 현대자동차는 도요타 혼다 등 일본 자동차회사를 적극 벤치마킹해 품질을 끌어올려 세계 3위 자동차기업으로 성장했다.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 스테디셀러인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는 2007년 탄생한 애플 아이폰을 참고해 개발했다.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주요 산업에서 한국은 추격자의 위치에 있지 않다. 세계 1~2위를 다투거나 적어도 선두 그룹에 포진해 있다. 더 이상 벤치마킹할 만한 모범답안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면 ‘세상에 없는 것’을 개발해야 하지만 기대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는 모양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 화이자와 모더나를 비롯한 글로벌 빅파마는 기존 백신·치료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메신저리보핵산(mRNA) 제품을 발 빠르게 개발해 시장을 놀라게 했다. 한국 제약사들도 코로나19 백신·치료제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기초과학과 원천기술 부족이 한국 기업의 발목을 잡았다.
‘패스트팔로어’가 아니라 ‘퍼스트무버’들의 경쟁에선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이 중요하다. 원재료가 풍부하게 갖춰져야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올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은 크레파스에 비유할 수 있다. 크레파스는 많을수록 좋다. 12색 크레파스로도 그림은 그릴 수 있지만 64색·128색 크레파스를 쓸 때만큼 풍부한 색감과 표현을 기대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은 축적하는 데 꾸준한 투자와 긴 시간이 필요하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만 25명을 배출한 일본에선 첫 수상자가 1949년 나왔다. 일본이 공업대국 반열에 오른 지 거의 반세기 만이다. 1922년 세계 최초로 항공모함을 개발했을 만큼 기술력이 뛰어난 일본이지만 노벨 과학상을 받기까지 수십 년이 더 필요했다.
일본이 기초과학의 저변을 넓히는 데 100년이 걸렸다는 분석도 있다. 일본인 노벨 과학상 수상자 25명 중 2000년 이전 수상자는 6명에 불과해서다.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을 초일류 선진국의 마지막 퍼즐로 보는 것은 그만큼 허들이 높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면 수십 년에 걸친 지식 축적 과정이 필수다.
냉정하게 보면 한국의 크레파스는 아직 12색 수준이다. 돈이 되는 산업 기술에 R&D 역량을 집중하다 보니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에 신경을 쓰기 힘들었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여전히 한 명도 없고 일본이 소재, 부품, 장비의 수출을 막으면 산업계 전체에 비상이 걸린다.
이미 퍼스트무버 대열에 선 한국엔 다른 지름길이 없다. 기존 선진국,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려면 기초과학과 원천기술 수준 제고가 필수다. 이 싸움은 수십 년이 걸리는 마라톤이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R&D 예산 확대는 기본이다. 20~30년 걸리는 장기 연구에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하고, 연구자 처우도 끌어올려야 한다. 성과 조급증은 한편에 접어둬야 한다. 실패를 용인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성공 확률이 1~2%에 불과한 프로젝트에 과감히 도전할 수 있다. 미래 먹거리인 우주와 양자, 핵융합 발전 등의 분야에선 더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한국판 맨해튼 프로젝트 도입해야
한국 R&D 시스템의 역동성이 이전 같지 않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세계적 학술지인 네이처는 지난달 한국 특별 호에서 “한국은 과학기술 연구의 가성비(bang for buck)가 낮은 나라”라며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지만 성과는 놀라울 정도로 작다”고 지적했다. R&D의 결과물인 논문과 특허가 상용화·사업화로 이어지는 사례가 극히 적다는 게 네이처가 지목한 한국 R&D의 약점이다.대다수 국내 연구자는 계량적 결과물에 집중한다. 이들에겐 논문을 몇 개 썼는지, 특허가 몇 개 나왔는지가 중요하다. 수치로 드러나는 결과물이 없으면 예산이 줄거나 프로젝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구자들은 소심해질 수밖에 없다. 실패 확률이 작은 논문을 위한 논문 연구가 대세가 되고, 혁신적인 도전은 뒷순위로 밀려난다.
여기에 사일로 현상이 더해진다. 사일로는 곡식을 저장하는 굴뚝 모양 창고에서 유래한 말이다. 조직의 편의와 이기주의 때문에 협업이 사라지면서 생산성이 뚝 떨어지는 현상을 뜻한다. 국내 과학기술계의 사일로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기업은 당장 가져다 쓸 만한 게 없다며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나 대학과 교류하지 않는다. 연구기관끼리도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불통은 비효율로 이어진다. 비슷한 연구가 곳곳에서 중복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전공이 다른 연구자들이 협업하는 ‘이종교배 연구’는 꿈도 꾸기 힘들다.
혁신 없는 사일로에 갇힌 과학기술계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소속 조직과 관계없이 다수 연구자가 모여 뚜렷한 목표에 집중하는 초거대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2차 세계대전 때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해 꾸려진 ‘맨해튼 프로젝트’가 좋은 롤모델이다. 이 계획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가 참여한 국제 프로젝트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요한 폰 노이만,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등의 천재 물리학자들을 필두로 전공이 제각각인 전문가 12만 명이 참여했다.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밝힌 게놈 프로젝트, 2025년에 달에 다시 유인 우주선을 보내는 아르테미스 프로젝트 등도 성공적으로 수행된 초거대 프로젝트다.
한국 R&D의 새로운 슬로건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글로벌 실험실’이어야 한다. 한국판 맨해튼 프로젝트가 곳곳에서 닻을 올리고 국내외 연구자들이 머리를 맞대는 과정에서 한국의 R&D 역량은 한층 더 고도화할 것이다.
송형석 테크&사이언스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