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프로스포츠 구단 감독이 '근로자'라는 첫 판결이 나왔다. 구단주가 원하면 잔여 연봉이나 위약금을 물고서라도 언제든 자를 수 있는 '파리목숨'으로 여겨졌던 프로 스포츠구단 감독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돼 '부당해고' 판결을 받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롤 프로게임 리그에 참여 중인 게임단 DRX는 A씨와 2021년 11월 1군 감독 선임 계약을 맺었다. 주요 업무는 ① 대외참가활동 ②훈련 활동 ③부대활동 등이었다.
하지만 A씨는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2022년 1월 성적 부진 등을 이유로 이메일로 해고를 통보 받게 됐다. DRX는 ‘코칭스태프로서의 능력 부족’ '업무 시간에 유튜브 시청하거나 자는 등 근무 태만" 등 4가지 사유를 제시했다. A씨는 소명서를 냈지만, 게임단 측은 결국 팀원 명단에서 A를 말소하고 트위터에 징계를 원인으로 한 계약 해지를 알리기도 했다.
이에 A씨는 '부당 해고'라며 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했다. 부당 해고가 성립하려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서 인정이 돼야 한다. 근로자성은 ‘사용자와 종속적 관계에 놓여 지휘·감독에 따르고 있는지’, 즉 고용 여부가 관건이다.
법원 "게임 종목서 감독 역할 제한적"
DRX측은 ‘A씨는 단순 근로자가 아니다’라며 맞섰다. 감독 업무에 관해 포괄적인 권한을 위임받아 업무를 독립적으로 처리했으므로 고용계약이 아닌 위임계약을 맺었다는 취지다. 구단은 중앙노동위가 A씨의 구제신청을 인용하자 법원에 중앙노동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하지만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7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고 봄이 타당하다"라고 판시하고 A씨 측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A감독의 업무상 자율성이 크지 않은 점이 근로자성의 근거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다른 프로스포츠 종목에 비해 경기 당 출전선수(5명) 대비 팀에서 활동하는 선수의 숫자가 많지 않고 개별 포지션별로 출전 선수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 선수 기용 폭이 좁은 편"이라며 "구체적인 전략·전술도 감독이 독자적 판단으로 결정하기보다는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의논해서 결정하거나 감독은 크게 관여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대회참가활동 또는 훈련활동을 하면서 회사의 정당한 지시에 불응하거나 경기에 참가할 만한 신체적·정신적 상태를 구비하지 못했을 때는 회사 측 요구에 따라 훈련일정 및 방식을 조정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며 "이런 규정 등에 비춰 보면 회사의 지시에 따라 감독이 업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회사는 "다른 구단들도 쓰는 표준 계약서 양식을 쓴 것"이라고 맞섰다.
하지만 법원은 "감독은 연습경기 일정 등 훈련 활동 내역을 회사에 보고했고, 수행해야 하는 대회참가활동 역시 이미 정해져 있었다"며 "구단을 운영하는 회사의 대표이사도 단장 등을 통해 감독에게 연습경기 중 음성녹음 파일을 요구하거나 연습실로 직접 와서 선수들의 연습경기에 관여하는 등 훈련활동에 개입하려고 했다"라고 꼬집었다.
“해고 사유인 근무태만, 감독을 근로자로 봤다는 증거”
근무태만을 이유로 A를 '징계'한 것도 역설적으로 감독을 근로자로 본 사유가 됐다. 재판부는 "구단 측은 연습실에 CCTV를 설치해 훈련활동을 관리 감독했고 이를 통해 발견한 비위행위(‘훈련시간 중 유튜브 시청하거나 자는 등 업무 및 근무 태만’)를 해고 통보서에 기재했다"며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근태관리를 했다는 뜻이고, 감독이 폭넓은 자율성을 갖고 근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꼬집었다.그밖에 △첫해 연봉이 4억원에 달했지만 활동하지 않을 경우 그 기간에 비례해 보수를 삭감하는 규정이 있는 점 △훈련 활동 등에 성실하게 참가하지 않을 경우 복무규정에 따라 참가인을 징계할 수 있었던 점도 감독이 구단에 종속된 근로자라는 근거로 들었다.
이번 판결은 구단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최종 확정됐다.
다만 이번 판결로 모든 프로구단의 선수·코칭스태프 모두의 근로자성이 인정된 것은 아니다.
재판부는 "프로축구, 프로야구와 같은 여타 프로스포츠 종목에 비해 게임 종목에 있어 감독의 역할은 어느 정도 제한적"이라며 "직무의 범위 역시 구단이 비교적 쉽게 지휘·감독할 수 있는 부분인 경기 외적인 요소에 집중된다는 특성을 감독의 근로자성 판단에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용문 덴톤스리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프로스포츠 감독은 일반적으로 특정 구단에 소속돼 선수단 관련 업무 일체를 총괄해 수행하게 된다"라며 "업무 수행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되지만, 모든 스포츠 감독 계약이 위임계약이라고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라고 지적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