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할거면 손해 메꿔놔"…근로자 족쇄된 보상금 조항들
"직원이 거래처와 미수금 등 법률상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을 진다"는 내용의 계약은 효력이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부당한 계속 근로를 강요하는 조항이라는 취지다. 전문가들은 '중도 퇴사 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등 근거 없이 직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조항은 효력이 없다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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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금 받아 놓고 가" 직원 고소한 회사

전주지방법원은 공업용 필름 도소매업체가 퇴사한 직원 A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A측의 손을 들어줬다.

A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약 3년간 이 회사에서 영업직원(직급 이사)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근로자다. A는 근무 기간 동안 월 급여 200만 원과 별도로 영업으로 발생한 월 매출의 순이익 30%를 수당으로 지급받아 왔다.

그러던 A는 2022년 12월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되면서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퇴사할거면 손해 메꿔놔"…근로자 족쇄된 보상금 조항들
하지만 이튿날 회사가 보낸 충격적인 내용증명우편을 받았다. 회사는 "(A가) 영업을 담당한 거래업체의 미수금이 9200만원에 이른다"며 "이듬해 2023년 1월까지 정리 방안을 제시하고 미수금을 회수하라"고 요구한 것.

회사 측은 "영업을 담당한 거래업체에 납품했음에도 그 대금을 받지 못한 미수금이 1억7188만원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또 미수금 9200만원에 대해선 "선주문해서 제품을 미리 생산했지만, A가 퇴직하면서 거래업체가 우리 회사의 제품이 아닌 다른 회사의 제품을 공급받도록 유도해 재고로 남게 된 제품의 금액"이라고 주장했다.

재판 과정에서 회사 측은 "A가 영업을 한 거래업체와 장래에 미수금 등 법률상 문제가 발생할 경우 A가 법률상 문제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는 특약을 구두로 체결했다"며 "게다가 A는 고용계약상 의무(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 신의칙상 고지의무, 경업피지의무)를 위반하거나 업무상 배임행위를 해서 미수금과 재고 금액 상당의 손해를 입게 했다"고 강조했다.

이를 바탕으로 회사는 A에게 "특약과 고용계약상 의무를 위반했다"며 "미수금 및 재고 금액 합계 2억6400만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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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회사가 주장하는 특약이 있었다는 별다른 증거가 없으며 설령 특약이 있었다고 해도 근로기준법 제20조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근로기준법 20조는 '사용자는 근로계약 불이행에 대한 위약금 또는 손해배상액을 예정하는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다.라는 규정이다. 근로자가 근로계약을 불이행했다는 이유로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을 넘어 '위약금'이나 '손해배상금'을 주도록 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다.

법원은 "(위약금 조항이 있다면) 근로자로서는 불리한 근로계약이어도 그 구속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다"며 "근로자가 퇴직의 자유를 제한받아 부당하게 근로의 계속을 강요당하는 것을 방지하고, 근로자의 직장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취지에 비춰보면 해당 특약은 근로기준법 제20조가 금지하는 위약금 또는 손해배상액의 예정에 관한 약정에 해당돼 무효"라고 판단했다.

그러자 회사는 "업무상 배임행위라는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이기도 하다"고 맞섰다.

하지만 재판부는 "A는 매출이 아닌 순이익 기준으로 30%의 수당을 지급받았다"며 "미수금이 발생하면 수당이 줄어드는데, 미수금 발생 가능성이 높은 거래업체에 영업을 하거나 그러한 거래업체와 거래할 동기나 이유가 없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퇴사 직전에 선주문을 한 후 해당 거래업체가 피고가 취직한 다른 회사와 거래하도록 유도했다는 주장도 아무런 증거가 없다"며 회사의 청구를 기각했다.

퇴사 족쇄 된 손해배상 협박

일부 기업에서는 퇴사를 하려는 근로자들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운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회사 내규에 '중도 퇴사 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거나 '의무 계약 기간'을 설정하고 그 전에 퇴사하면 손해배상을 묻겠다는 회사도 있다.

이런 조항은 법을 잘 모르는 근로자들에게는 상당한 압박이자 족쇄가 된다.

하지만 실제로 근로자의 심각한 과실로 손해가 발생한 게 아닌 이상 근로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는 쉽지 않다.

정상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원칙적으로 근로자가 퇴사한다는 것만으로 손해 발생 여부와 관계없이 일정 손해배상을 물리는 약정은 근로기준법 제20조를 위반해 무효”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근로자의 과실로 발생한 손해를 배상시키는 것은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퇴사를 이유로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손해에 대해 배상 조항을 정하는 것은 무효라는 의미다.

정 변호사는 "근로기준법에는 ‘강제근로금지원칙’이 있는데, 위약금 조항은 강제 근로를 강요하는 셈"이라며 "퇴사 시 돈을 반환한다는 약정의 그 효력은 부인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되레 근로자에게 일방적인 위약금을 약정하거나 손해배상을 예정하는 계약을 체결하게 되면 사용자에게 5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교육 과정에서 비용이 발생했다면서 배상하라는 회사도 있다. 물론 유니폼이나 회사 비품 등에 대해서는 반환해야 하지만, 사용자의 업무상 필요와 이익을 위해 실시한 교육 비용은 사용자가 부담해야 하므로 반환할 필요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다만 일정 금전적 이익을 미리 받으면서 의무 근로기간을 두는 경우엔 얘기가 다르다. 기업이 고용계약 등을 체결하면서 의무기간을 두는 대신 급여 외에 일시불로 지급하는 금품인 '사이닝보너스(Signing Bonus)' 계약은 기간이 지나치게 길지 않다면 유효하다고 보는 게 법원의 입장이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