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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은행에 재직하던 중 사망한 A씨의 남편은 퇴직금으로 약 1억원을 남겼다. 하지만 A씨와 자녀들은 이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이들은 고인의 상속재산 한도 내에서 채무를 갚는 조건으로 상속받는 '상속한정승인'을 법원에 신청했는데, 상속재산 목록에 퇴직금을 함께 올린 탓에 이 돈마저 남편의 채무를 갚는 데 쓰이게 됐기 때문이다.
A씨와 자녀들은 상고심까지 이어진 법정 싸움 끝에 퇴직금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됐다. 법원은 단체협약 등을 통해 유족에게 지급하도록 규정한 사망퇴직금은 상속재산이 아닌 '고유재산'으로 채권 추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비슷한 쟁점의 사건에 대해 하급심 판결들이 엇갈려온 가운데 대법원이 교통정리를 한 셈이다.
1·2·3심 모두 ‘고유재산’ 인정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는 최근 A씨 등이 농협은행 등을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득금반환 소송의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취지로 판결했다. 대법원은 “고인의 퇴직금은 유족 고유재산”이라고 판시했다.농협은행은 ‘사망으로 인한 퇴직자의 퇴직금은 근로기준법이 정하는 바에 의해 유족에게 지급한다’는 내용을 단체협약과 퇴직금 규정에 두고 있다. '사망으로 인한 퇴직 시 퇴직금을 증액해 지급할 수 있다'는 취지의 특례조항도 함께 함께 담겼다. 이 특례조항에 따라 농협은행은 A씨와 자녀들에게는 사망퇴직금 1억868만원을 지급해야 했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한정승인을 신청한 가운데 사망퇴직금을 상속재산이라고 판단한 농협은행은 사망퇴직금 절반을 공탁했고, 이 금액은 채권자들에게 배당됐다. 나머지 금액도 유족에게 주지 않고 그대로 보유했다.
이에 A씨와 자녀들은 농협은행에 대해 퇴직금 지급을 청구하고, 채권자들에 대해선 배당된 부분에 대한 부당이득 반환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유족들은 “사망퇴직금은 고유재산이기 때문에 한정승인을 받았더라도 채무 변제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이 사건 사망퇴직금은 원고들의 고유재산이고, 그중 절반에 대해 이루어진 집행 및 배당은 무효"라며 원고 승소 취지로 판단했다.
2심도 유가족 손을 들어줬다. 다만 2심 재판부는 "망인의 배우자인 A씨가 최선순위 유족으로서 사망퇴직금의 정당한 수급권자"라며 자녀들에 대해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또 농협은행이 지급하지 않고 보유한 금액에 대해선 근로기준법 시행령이 정한 연 20% 비율로 계산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원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봤다. 다만 "원심판결 선고일 이전까지 연이율 20%의 지연손해금을 적용해선 안 되고 원심판결 선고일 이후부터 적용해야 한다"며 원심의 지연손해금 부분만 파기자판했다. 파기자판이란 원심 판결을 파기한 법원에서 사건을 다시 재판하는 것을 말한다.
대법 “사망퇴직금은 유족의 고유재산”
그동안 재직 중 사망한 근로자의 퇴직금을 유족에게 지급하도록 한 사업장에서 그 사망퇴직금이 유족의 고유재산인지 상속재산인지 여부가 종종 문제가 됐다. 주로 A씨의 경우처럼 상속된 채무가 있어 상속인들이 한정승인을 한 경우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명시적인 판례가 없어 하급심 판결도 엇갈렸다.농협은행은 단체협약에서 근로자의 사망으로 지급되는 퇴직금(사망퇴직금)을 근로기준법이 정한 유족보상의 범위와 순위에 따라 유족에게 지급하기로 규정했다. 이를 두고 대법원은 "개별 근로자가 사용자에게 이와 다른 내용의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한 수령권자인 유족은 상속인으로서가 아니라 위 규정에 따라 직접 사망퇴직금을 취득하는 것"이라며 "이러한 경우의 사망퇴직금은 상속재산이 아니라 수령권자인 유족의 고유재산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또 "사망퇴직금은 근로자의 사망 당시 그에 의해 부양되고 있던 유족의 생활보장과 복리향상 등을 위한 급여로서의 성격도 함께 가진다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단체협약에서 생활보장이 필요한 유족에게 사망퇴직금을 지급하는 내용을 정하는 것은 사망퇴직금의 성격에도 부합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 판결은 사망퇴직금의 수령권자를 유족의 생활보장과 복리향상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정한 경우에는 그러한 정함이 유효하고, 이때 사망퇴직금은 원칙적으로 상속재산이 아니라 해당 유족의 고유재산이라는 법리를 최초로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