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억대 연봉을 받으며 부장급으로 뽑힌 법무팀 사내 변호사가 수습 기간 근무 평가가 엉망이었더라도 해고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수습 평가가 팀장 1명에 의해 이뤄져 주관적이고, 평가의 근거가 된 변호사의 행위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서는 정식 채용도 아닌 수습이었던 데다, 해당 회사 규모 자체가 작고 법무팀도 3명에 불과한 점에 비춰 보면 사업주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입증 책임을 요구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습기간 근무평가 엉망인데도…
변호사 A는 2019년 8월 19일 B회사로부터 억대 연봉을 받는 법제팀 '부장' 자리를 제안 받았다. 문제는 3개월의 수습기간을 두기로 했는데 수습기간 동안 회사의 A에 대한 평가는 최악이었던 것.같은 부서 직속 상사이자 평가자인 법제팀장 C상무는 조직문화 적합도, 전반적 역량, 민첩성 등 5개 평가 항목을 모두 '기대 이하'라고 평가했다. 평가 등급은 △기대 이하 △기대 충족 △기대 이상으로 구성돼 있다. 상무는 A가 근로시간도 자주 지키지 않고, 상급자의 지적에 대한 반응도 좋지 않아 회사 분위기를 해쳤다며 여러 사례를 평가서에 담았다. 해당 평가에 기초해 회사는 3개월만인 2019년 11월 14일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이에 대해 A가 '부당해고'라며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냈고, 중노위가 A의 손을 들어주자 회사가 중노위를 상대로 '부당해고구제재심판정 취소'의 소송을 제기한 것.
재판 과정에서 회사는 "A가 입사하고 2주부터 법무 업무 수행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사측은 "온라인 주문 시스템에 활용하기 위한 이용약관, 개인정보 동의서 검토 등 업무를 맡겼지만, 법률전문가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실했다"며 "수습 근로자임에도 근로 시간을 준수하지 않고 오전 9시를 넘어 출근한 날이 36일(88%)에 달했다"고 꼬집었다.
또 "이에 법무 부담을 줄이고 준법 감시 업무를 늘리는 등 업무분장을 조정해줬지만, 업무 피드백에도 예민하고 짜증스럽게 반응해 팀 분위기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훼손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A는 "회사가 수습 평가 기준을 고지하지 않았다"며 "상무도 적절하게 업무를 분배하지 않았다"고 맞섰다. A가 업무를 무단으로 수행했다는 B의 주장에 대해서도 근거가 없다는 식으로 맞섰다.
법원 “현저한 역량 부족 입증할 증거 부족”
하지만 최근 대법원 1부는 A의 손을 들어준 2심 판결을 그대로 인용하고 A의 승소를 확정했다(2023두36565).앞서 2심서 서울고등법원은 "(평가) 표에 기재된 사유의 진위는 A와 함께 근무한 직상급자인 C 상무만이 안다"며 "회사 내의 임⋅직원들 중 누구도 위 결과표에 기재된 사유에 해당하는 사실관계 자체가 실제 존재하는지 실질적으로 검증하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재판부는 "회사는 A가 ‘부장’이라는 직급 및 억대 연봉을 받는 법률전문가(사내변호사)로서의 지위와 경력 등을 고려할 때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정도의 현저한 역량 부족을 드러냈다고 주장한다"며 "하지만 제출된 증거들을 살펴봐도, 의사소통 능력과 관련해 과연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개인정보 제공동의서와 관련해 참가인의 업무가 어떠한 점에서 부족했거나 잘못됐는지를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회사는 "해당 조직은 구성원이 3명밖에 안되는 조직"이라며 "직상급자가 작성한 수습평가표 작성은 인사 평가의 일환이므로 그 정당성을 섣불리 배척하면 안 된다"라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재판부는 "시용 계약이 끝나고 본계약 체결을 거부하는 것은 일반 해고보다는 (사유가) 넓게 인정되나, 이 경우에도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의 근무시간 준수율이 저조하다는 주장엔 "설령 그렇다고 해도 막 입사해서 시용기간 중인 근로자였으므로 근태 관련 규율을 고지해서 개선을 촉구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밖에 허위보고 문제 등 C와 A가 겪은 트러블에 대해서도 법원은 "A가 일관되게 그런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며, A와 대립하는 상무의 증언도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인력관리 인원 부족한 기업 ‘한숨’
이번 대법원 판결은 HR이나 인력 관리에 투여할 인원이나 업무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 기업들에 '매운맛'을 보여준 판결이라는 평가다.특히 이 회사는 상시 근로자가 160명 정도인 중견기업인데다, 팀 자체도 작아 수습 근로자의 해고를 위한 근무 평가 규정이나 사유를 객관적으로 준비하고 철저하게 기록하기는 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한 노동전문 변호사는 "법률적인 기준에만 따르면 대법원 판결도 맞지만, 현실을 도외시했다"며 "수습 근로자에 대해서까지 임원들의 교차 검증 절차를 두거나, 팀장의 개인적인 피드백 과정까지 녹취·이메일 등을 통해 객관적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기업이 많지는 않다"고 꼬집었다.
이어 "기껏 수습(시용) 제도를 두더라도 수습 기간에 대한 객관적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외부 검증 절차까지 설정해두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판결"이라며 "B사도 평가절차를 나름 준비한 것처럼 보이지만 평가 증거가 부실한 경우 역으로 큰 법률적 리스크를 지게 할 수 있다는 따끔한 교훈을 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