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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회사에 맡긴 부동산도 위탁자의 채무 불이행을 사유로 한 강제집행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대법원은 적어도 수익자를 다른 사람으로 지정한 신탁 부동산만큼은 위탁자의 책임재산(채권자의 공동담보로 제공된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강제집행할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최근 내놓았다. 부동산을 신탁회사에 맡긴 사람이 채무 불이행으로 채권 추심을 당하더라도 수익자를 다른 사람으로 지정한 신탁 부동산은 추심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법원 3부는 2023년 7월 27일 신용보증기금이 A씨를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득 반환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서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신탁법상의 신탁재산은 수탁자(신탁회사)의 고유재산으로부터 구별돼 관리될 뿐만 아니라 위탁자의 재산권으로부터도 분리돼 독립성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위탁자의 채권자에게 공동담보로 제공되는 책임재산이라고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신탁 특약에 타인을 수익자로 지정
이 사건은 약 1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고인 A씨는 2004년 6월 5일 형인 B씨 명의로 서울 서대문구의 한 아파트를 3억원에 매수했다. 8월 5일에는 해당 아파트의 소유권을 B씨 명의로 이전하는 등기를 마쳤다.B씨는 2008년 1월 8일 한 신탁회사와 이 아파트에 대한 담보신탁 계약을 맺었다. 신탁 우선수익자로는 농협중앙회, 수익자는 A씨로 지정했다. 신탁계약이 종료될 경우 신탁 부동산의 소유권을 피고 A씨에게 이전한다는 특약사항도 달았다. 다음날 B씨는 신탁회사 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다. 1월 11일에는 우선수익권을 담보로 농협중앙회로부터 1억3000만원을 대출받았다. 그 후 B씨는 2016년 8월 12일 이 아파트를 다시 A씨에게 4억5000만원에 매도했다. 신탁계약이 종료될 경우 부동산 소유권을 A씨에게 넘기기로 한 특약 조건을 따랐다. 신탁회사는 8월 17일 A씨에게 해당 아파트의 소유권이전등기를 해줬다. A씨는 해당 아파트에 대해 한 시중은행과 2억4000만원의 근저당권설정 등기를 하고 대출을 받았다.
한편 B씨는 2005년 한 회사를 경영했는데 당시 신용보증기금이 발급한 신용보증서를 담보로 중소기업은행으로부터 2억5000만원을 대출받았다. 하지만 2008년 1월 2일 대출원리금을 변제하지 못하는 신용보증사고를 일으켰고, 이에 신용보증기금은 같은 해 3월 26일 중소기업은행에 B씨 회사의 채무 약 2억원을 갚아 B씨에 대한 구상금채권을 가지게 됐다.
아파트를 A씨에게 다시 매도할 당시 B씨는 별다른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채무가 자산을 초과한 상태였다. B씨의 채권자인 신용보증기금은 B씨가 자신의 거의 유일한 자산인 아파트를 매도함으로써 신용보증기금에 대한 구상금채권 회수를 어렵게 만들었다고 봤다. 이에 "B씨가 A씨에게 아파트를 매도한 행위가 '사해행위'에 해당한다"며 "매매계약을 취소하고 가액배상 방법으로 원상 회복하라"는 취지의 소송을 제기했다. 사해행위란 채무자의 부채가 자산보다 많아지거나 그 부족 정도를 커지게 하는 법률 행위를 뜻한다.
상고심서 판결 뒤집혀
1심 재판부는 지연손해금 지급 청구 부분만 기각하고, 나머진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2심도 "이 사건 매매계약은 사해행위로 취소돼야 한다"며 신용보증기금의 손을 들어줬다. 2심 재판부는 "매매계약 당시 형인 B씨는 채무 초과 상태로 이 사건 아파트 외에 별다른 재산이 없었으므로, 이 사건 매매계약은 B씨의 일반 채권자에 대해 사해행위가 되고, 수익자인 피고도 채권자의 이익을 해한다를 사실을 인식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아파트 매매계약을 사해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며 원심 판결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이 아파트는 신탁회사에 소유권이 귀속되고 위탁자인 B씨의 재산권에서 분리돼 독립성을 갖기 때문에 B씨의 책임재산(강제집행 대상이 되는 재산)이라고 할 수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또 "신탁계약상 수익자가 B씨가 아닌 농협중앙회(우선수익자) 및 A씨(수익자)로 지정됐으므로 신탁계약상 수익권 역시 B씨의 책임재산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대법원 관계자는 "수익자가 위탁자가 아닌 타인으로 지정된 경우에는 신탁계약상 수익권이 타인에게 귀속되므로 위탁자의 책임재산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을 최초로 판시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